[츠카레오] 열대야
츠카레오 전력 120분, 주제 <여름밤 데이트>
“와하하! 정면 승부다, 여름아! 3일 동안 여름에 걸맞는 명곡을 마구마구 써내려 주마!”
레오가 두 팔을 벌리고 선언 아닌 선언을 한다.
한여름에 재앙처럼 찾아온 에어컨 고장에 급하게 A/S 신청을 해둔 게 이틀 전이었다. 성수기라 수요가 많아 적어도 3일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는 절망스러운 대답에도 호기롭게 눈을 빛내며 외쳤던 레오도 막상 선풍기 한 대로는 버티기 무리인 7월의 무더위 앞에서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낮에야 카페라든가 도서관이라든가 그를 데리고 시원한 곳을 찾아다닐 수 있었지만, 매미만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밤에는 그러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호텔을 예약하려 해도 휴가철 성수기라 방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강제로 열대야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레오는 아래로 내려 묶던 머리를 위로 질끈 올려 묶고 연신 덥다며 선풍기를 끌어안고 들들 볶아댔다.
"너무 더워서 인스피레이션도 녹아 버렸어! 이게 다 멍청하게 고장나버린 네 녀석과 미지근한 바람만 뿜어대는 네 녀석 때문이다!"
"그런다고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건 아닐 텐데요."
불퉁하게 말하면서도 손은 성실하게 파일철을 흔들며 레오에게 바람을 보내대기 바빴다. 여름에는 에어컨을 끈 적이 없으니 부채를 살 필요조차 없던 도련님의 손에 들린 파일철의 라벨링이 애처롭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하도 흔들어대 이미 가로로 꺾인 자국이 여기저기 선명했다.
"스오는 대체 어떻게 그렇게 의연한 표정인 거야. 나는 참아 볼래도…… 역시 더워! 이대로 더워서 곡을 쓰지 못 한다면 그건 세계적, 아니 우주적 손실이야......."
툴툴대는 레오의 목소리가 선풍기 바람에 부딪혀 와글와글 떨려댔다. 의연하게 말하는 츠카사도 정작 포커페이스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평상시라면 단정하게 잠가 두었을 셔츠의 목깃도 두어개가 풀려 꽤 피부를 드러낸 채였다.
한껏 열어재낀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실내의 후덥지근한 공기를 전부 밀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오늘밤만 버티면 내일은 수리업체가 올 거예요.”
츠카사가 땀에 젖은 레오의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열에 달아오른 레오의 볼이 은근하게 발갰다. 거울을 보지는 않았으나 자신도 저렇게 열이 올라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므…… 스오-, 못 참겠어! 차라리 나가서 드라이브라도 갔다 오자. 집 안은 너무 더워! 이럴 거라면 차에서 에어컨 틀어두고 자는 게 낫겠어!”
레오가 벌떡 일어나 차키를 챙기며 말했다. 이런 이유로 어제도 그제도 드라이브를 하고 들어왔었다. 의도치 않게 생긴 한여름밤의 데이트는 썩 유쾌하지는 않은 계기였다. 츠카사의 손을 잡아끄는 레오의 손짓에 구김 간 파일철이 바닥을 뒹굴었다. 바람을 맞던 상대가 없어진 선풍기가 홀로 열을 내며 바깥보다 후덥지근한 실내의 열기를 밀어내기 위해 연신 모터를 돌려댔다.
보조석에 츠카사를 태운 레오의 차가 부드럽게 도로를 달렸다. 그제는 동네 안, 어제는 츠카사의 회사까지 가는 길목을 달리던 차가 세 번째 야행에 힘을 입어, 둘이 졸업한지 어느덧 2년이 지난 유메노사키 학원까지의 길을 되짚었다.
차는 당연하다는 듯이 잠긴 새벽의 교문을 지나 근처 해변까지 달린 후에야 멈췄다. 학생 시절에는 툭하면 사라지던 레오를 찾으러 츠카사도 자주 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 슬럼프가 오면 자주 찾던 곳이라고 했던가요.”
“… 응. 기억하고 있구나. 나, 슬럼프가 오면 바닷가에서 노을을 보는 취미가 있거든. 물론 지금은 완전히 캄캄해져버렸지만!“
레오가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리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11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외진 곳에 있는 해변이라 인공적인 불빛도 얼마 없어 어두운 해수면 위로 츠카사가 든 핸드폰 플래시 불빛만 일렁였다.
“노을은 없지만 바닷바람은 있으니까! 바람아, 더위를 날려 줘! 슬럼프를 끝내 줘!”
레오가 바닷가를 향해 두 팔을 벌려 섰다. 뭡니까, 그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 아이 같은 그를 보고 있자면 어김없이 웃음이 새 나왔다.
레오의 질끈 올려 묶은 머리와 짧아서 채 묶이지 못한 채로 아래로 흐드러진 잔머리칼이 바닷바람에 흔들렸다. 바다의 짠내와 물기가 가득한 습한 바람이었지만 왠지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학생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곳이라 그런 건지. 생각해보면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운 땡볕 아래에서 제 뒤를 쫓아오던 츠카사와 때아닌 추격전을 벌이면서도 덥다는 생각보다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에게 잡혀 잔소리를 귀 아프게 들으면서도 와하하 웃어 제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츠카사 본인은 더웠을지 짜증났을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츠카사가 모래 위로 앉으며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옆자리에 깔았다. 예전부터 이런 데에서는 참 꼼꼼한 타입이었다. 저보다 레오가 훨씬 아무데나 걸터 앉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매너를 지키는 건 중요한 것이라며 손수건 깔린 자리를 한사코 양보했다. 어느덧 3년을 받아온 그의 배려에 레오는 자연스럽게 츠카사의 손수건 위를 깔고 앉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앉아 손을 잡았다. 더워서 도망치듯 나왔던 것임을 잊은 것인지, 맞잡힌 손바닥에 열기가 가득 들어차도 손을 놓지 않았다.
츠카사가 켜두었던 휴대폰 플래시를 끄자 주위에 훅 어둠이 내려 앉았다. 철썩- 철썩- 규칙적으로 치고 빠지는 파도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바닷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칼을 흔들었다. 이런 거, 가끔은 싫지 않은 것 같아. 맞잡은 손이 그 말에 맞장구 치는 듯했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작은 불빛을 포착한다. 시작은 츠카사였다. 레오씨, 저기 봐요. 비어있는 한 손을 들어 가리킨 그 끝에는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있었다. 자동차 라이트도, 핸드폰 라이트도 없는 어둠이라 보이는 광경이었다.
처음에는 흐릿하게 보이던 별들이 점점 번지며 시야를 채워 나간다. 레오는 의외로 대답도 없이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츠카사는 밤하늘과 그런 레오를 번갈아 바라보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한참 밤하늘을 들여다 보던 레오가 자유로운 한 손으로 모래 위를 탁탁 두들기며 박자를 맞춘다. 열중한 눈이 밤하늘처럼 빛났다. 점차 손 박자에 맞춰 흥얼거리는 콧노랫소리가 흘러 나와 섞인다. 츠카사는 옆자리에 챙겨 두었던 노트를 펼쳐 펜과 함께 레오에게 건넸다.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든 레오가 손을 바삐 움직이며 노트 위로 밤하늘을 새겨 넣었다.
별이 일렁거리는 밤바다 위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노랫소리는 열대야를 잠재우는 자장가가 되어 여름밤 위로 하늘하늘 이불 마냥 덮였다.
어느새 더위도 슬럼프도 날아가버린 여름밤의 밤바다가 철썩- 철썩- 파도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노래 위로 목소리를 보탰다.
물론 츠카사라면 별장도 많을 거고 공간 하나쯤은 손쉽게 구할 테지만 소설적허용으로 가볍게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